신인상파 / 들로네 / 말레비치 (ABC_02_4) by YO

신인상파 화가인 쇠라와 시냐크는 색=빛을 인간의 눈에만 의존하여 표현하는 것에 한계를 느 끼고 과학적 근거를 필요로 했다. 쇠라는 혁명적인 색채론을 내놨고 이전의 여러 학자들이 제 시한 이론을 근거로 하였기 때문에 쇠라의 색채론이 혁명적이기는 하지만 미학의 근본적인 규 칙과 상반되지 않다라고 하는 것이다. 쇠라가 근거로 삼은 이론들을 살펴보면 쇠라의 작품 특 성을 알 수 있다. 슈브뢸과 쿠튀르등 여러 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색을 혼합하지 않고 계산된 방법에 따라 화폭에 옮겨 색의 대비와 순수함을 보여주었고 샤를르 블랑이 권장한 순색의 아 주 작은 자국들을 사용하였다. 이 기법을 점묘법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색은 추상적이며 화폭 위의 사물과 관계없이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자율적 존재라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쇠라는 색조의 점차적인 전이를 택했고 시냐크는 일정한 테두리 안에서 대립되는 강렬한 색을 사용해 색들이 서로에게 주는 피해를 감소시켜 색들이 갖는 독창적인 힘을 살렸다. 쇠라와 시 냐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각적 혼합을 통해 순수한 색=빛과 동일한 질의 색을 창조하려는 그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따라서 들로네는 시각적 혼합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들로네의 모든 예술은 빛의 탐색을 목표로 하는데 그의 혁신은 빛이 운동성과 진동을 통해 모 든 오브제와 무관한 채색된 형태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따라서 들로네는 추상에 도달하였고 최초의 추상화 <창> 시리즈를 만들었다.
들로네는 색이 빛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빛은 자연 속에서 인간이 지각하는 빛이다. 들로네가 색은 빛이라고 한 이유는 색의 대비와 하모니가 자연에서 빛의 움직임과 흡사한 동시 진동을 우리 시각에 유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들로네의 작품에서 빛은 우리가 보는 색 자체이다. 들로네에게 예술은 하모니인데 그 하모니는 색의 깊이에 의해 나온다고 생각했고 특히 색의 동시대비가 그림의 역동성과 구성 그리고 색의 표현력을 보장한다고 생각해 색 자체인 그림이 야말로 아릅답다고 표현한다.

그의 작품 특성은 동시대비 법칙을 따르는 색 운동으로 설명된다. 채색된 면의 테두리와 빛을 발하는 후광들의 간격 사이에 생기는 진동이 색의 운동을 야기하고 이 색의 운동이 깊이를 준 다. 작품 <창>들이 들로네의 색에 대한 개념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는데 처음으로 색이 그림 의 중요한 유일한 요소가 되며 주제, 형태, 공간 그리고 빛의 운동을 표현한다.

들로네가 색의 분석에 몰두하고 색의 지각에 대한 현상 자체를 그림의 주제로 점차 변화시킬 때, 브라크와 피카소는 형태의 시각적 지각의 과정에 빠져 일시적으로 색을 포기했다. ‘세잔풍 의 큐비즘’과 ‘분석적 큐비즘’의 기간에는 색을 포기했다가 ‘종합적 큐비즘’의 단계에 와서 다 시 색을 선택했다. 색은 형태와 동시에 작용하지만 형태와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여기면서 다 시 색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은 색을 이전의 자연 속의 빛과 같은 색이 아니라 상징과 의미를 전달하는 형태로 간주한 것이다.

말레비치 역시 들로네와 마찬가지로 빛을 추구하여 추상에 도달한다. 말레비치의 시각에서 빛 을 추구하는 것은 빛의 원천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동일하다. 말레비치의 이런 시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백색 정사각형>이다. 이 작품에서 색의 배척을 통해 색의 원천인 빛 에너지 에 이를 수 있고 주제인 흰빛 자체는 아무것도 아닌 것의 표현이고 상징이기 때문에 빛과 진 리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다. 그의 빛에 대한 개념은 그가 일반적인 빛(자연의 빛)과 이성의 빛 (진실됨, 진리)라고 부르는 것을 포함한다. 그는 프리즘을 통해 같은 그 무엇이 다른 양태들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해 두 가지 결론을 내린다. 하나는 결국 빛은 색과 동일하고 색은 빛과 동일하다는 결론이다. 또 다른 결론은 모든 인간, 문화, 예술적 흐름도 프리즘 이라는 것 이다. 그 안에서 빛은 두 가지 방식(일반적인 빛과 이성의 빛)으로 회절하여 진실한 실체를 관 찰할 수 있게 한다. 말레비치는 이 두 번째 결론을 통해 색을 문화적 수준의 지표로 간주하였

다. 이 결론을 적용하여 예를 들면 시골마을의 프리즘과 도시의 프리즘에서 나온 색은 다를 것이다. 이런 결론들이 말레비치로 하여금 무지개와 달리 ‘색의 세 가지 모멘트와 무채색의 다른 두 가지 모멘트, 검은색과 흰색’이 발현되는 절대주의 프리즘을 정의할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