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잔느의 회의> (1)

<세잔느의 회의> (1)

– 메를로 퐁티 의 [현상학과 예술] 중.

그는 하나의 정물화를 위해 100번의 작업 시간을 필요로 했고, 하나의 초상화를 위해 모델을 150번이나 앉혀 놓았다. 우리는 그의 작품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세잔느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시론이요, 그에 대한 접근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1906년 그의 나이 67세 되던 해 9월-그러니까 죽기 한달 전-그는 이런 글을 썼다. ” 나는 그토록 심한 정신적 동요, 그토록 거대한 혼돈에 말려들어가 한동안 나의 약한 이성이 도저히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하였다. 이젠 조금 나아진 것 같으며 내가 추구하는 방향을 좀더 분명히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강렬하게 오랫동안 추구한 목표에 나는 과연 도달할 수가 있을까? 나는 아직도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있으며 서서히 진전을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림은 그의 세계였으며 그림그리는 일은 그가 삶을 영위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제자도 없이, 자기의 가족이나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나 격려한번 받아본 일 없이 홀로 작업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오후에도 그는 그림을 그렸다. 1870년 병역을 기피했다는 이유로 경찰이 그를 쫓고 있을 때에도 그는 에스타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는 자신의 그림이 갖는 새로움이 혹시나 자신의 눈의 고장으로부터 온 게 아닌지, 그렇다면 자신의 전 생애란 그의 신체의 이상에 근거하고 있는게 아닌지 하는 의문을 갖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과 회의에 대해 그 당시 사람들 역시 의심과 어리석음으로 응답했을 뿐이었다. 1905년, 한 비평가는 그의 그림을 두고 “술독에 빠진 오물 청소부의 그림” 이라고 힐난한 바 있다. 오늘날에도 모크레르 같은 사람은 세잔느가 자신의 무기력에 대해 했던 고백으로부터 그에 대한 비난의 건덕지를 찾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잔느의 그림은 전 세계에 널리 퍼졌다. 그에게는 왜 그처럼 가누기 힘든 불확실함과 그처럼 많은 노력과 실패들과 그리고 졸지에는 위대한 성공이 있게 되었을까?

어린시절부터 세잔느의 친구였던 에밀 졸라는 그에게서 천재성을 발견한 최초의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실패한 천재” 라고 말했던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졸라처럼 그림의 의미보다 성격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고 세잔느의 생애를 관찰한 사람에게 있어서 그의 생애란 병고로 일관된 인생이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일찌기 1852년, 엑스에 있는 부르봉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세잔느는 심한 분노의 발작과 우울증으로 그의 친구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그롤부터 7년 후, 화가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나서도 그는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여 아버지-모자점을 했으나 후에는 은행원이 된 아버지-에게 자기를 파리로 보내달라는 부탁을 감히 하지 못했다. 졸라는 편지로 그의 불안정과 그의 나약함과 그의 우유부단을 나무랬다. 마침내 파리에 와서도 그는 이런 편지를 썼다. ” 내가 바꾼 것이 있다면 그것은 거주지일 뿐이며 나의 적은 항상 나를 따라 다니고 있다.” 라고. 그는 토론도 견뎌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토론이란 것이 그를 지치게 해줄 뿐이며 또 자신의 주장도 제대로 펼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의 천성은 근본적으로 불안 그것이었다. 요절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는 42살 되던 해에는 유언까지 말들어 두었다. 46살 때에는 6개월 동안이나 그를 엄습한 격렬하고도 괴로운 열정에 시달렸는데 그 증상이 어떠했는가는 아무도 모르며 세잔느 역시 그에 대해서는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51살 때에는 엑스에 다시 은거하여 자신의 천재적 재능에 가장 적합한 풍경을 발견하였으나, 이는 또한 자신의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이의 세계로 돌아간 것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세잔느는 자기의 부양을 아들에게 의존했다. 그는 종종 “인생이란 소름끼치는 것” 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 무렵 그가 처음으로 익히기 시작한 종교는 그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는 한 친구에게 이런 식의 설명을 하고는 했다. “무섭군. 다음 며칠 동안은 지상에 있을 것이라고 느끼고 있지만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사후의 삶을 믿고 있네. 그래서 나는 후세에소 볶이는 모험을 원치않고 있다네” 후에 그의 종교가 더욱 심화되어 갓지만 그 첫동기는 그의 삶을 질서있게 하여 삶으로부터 구제를 받자는 요청이었다. 그는 갈수록 미약하고 의심이 많아지고 민감해졌다. 가끔 파리에 와서 친구를 만나면 멀리서부터 아예 접근하지 말라는 몸짓을 해보였다. 1903년, 그의 그림이 모네의 그림보다 두 배나 더 비싸게 파리에서 팔리기 시작한 후 요하킴 가스께나 에밀 베르나르와 같은 젊은이들이 찾아와 질문을 했을 때 그는 다소 긴장감을 풀고는 했었다. 그러나 그의 분노의 발작은 계속되었다. 한 예로 엑스에서 길을 지나고 있을 때 한 어린이가 그를 때린 이후로 그는 어느 누구와의 접촉도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아주 고령이 된 어느 날 그가 비틀거리기에 에밀 베르나르가 그를 좀 부축하자 그는 화를 내었다. 그는 자기의 화실을 서성거리며 돌다가는 누구라도 “그의 갈고리를 내 몸엔 댈 수 없다”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그것이 “갈고리” 라고 생각한 떄문에 그는 자기의 모델이었을 여인들을 화실 밖으로 몰아냈고, 그가 끈끈하다고 말한 목사들을 자기의 인생에서 추방시켰고, 에밀 베르나르의 이론들이 너무나 강압적으로 되었을 때 그는 그들 이론을 자기의 마음으로부터 몰아냈다.

융통성 있는 인간 접축의 이 같은 상실, 새로운 상황에 대처할 수 없는 이 같은 무능, 익숙된 습관과 여하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분위기 속으로의 이 같은 도치, 이론과 실제에 있어서 “갈고리” 대 은둔자의 자유라는 이 같은 고질적 대립 등, 이들 모든 증상들이야말로 누구나 그를 두고 병적인 체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예컨대 화가 엘 그레코의 경우처럼 정신분열증이라 말하게 할 수 이쓴ㄴ 것들이다. 그러나 “자연으로부터의” 회화라는 생각은 바로 이 같은 병적인 쇠약으로부터 떠올랐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자연과 색채에 대한 그의 극단적일 정도의 면밀한 주목, 그의 그림이 갖는 비인간적 성격-그는 사람의 얼굴도 하나의 대상으로서 그려져야 한다고 말한 바 있을 정도로 -, 가시적인 세계에 대한 그의 집착 등 이들 모든 것들은 그러므로 인간 세계로부터의 도피 곧 그의 인간성의 소회 그 자체를 대변해 주고 잇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추측들은 그의 작품의 적극적 측면에 대해 어떠한 관념도 제공해 주진 못하고 있다. 즉 그들 추측들을 가지고 우리는 그의 그림이 타락의 현상이라거나 또는 니체가 일컬었듯 “고갈된 삶”이라고 결론지을 수도 없으며 또는 그의 그림은 교욱받은 사람에게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다. 세잔느의 실패를 믿고 있었던 졸라와 베르나르의 생각은 아마도 그들이 세잔느를 개인적으로 알아, 그의 심리상태를 너무 지나치게 염두에 두고 있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경쇠약의 토대에서일망정 세잔느가 누구에게나 타당할 수 있는 예술의 형식을 잉태했다는 사실도 진정 있을 수 있는 일의 하나이다. 혼자 떨어진 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자연관찰을 세잔느ㄹ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의 의미는 결코 그의 사생활로부터 결정될 수가 없는 일이다.

또한 그의 작품의 의미는 미술사의 견지에서, 즉 세잔느의 방법에 끼친 제영향등-이탈리아의 화파와 들라크르와, 쿠르베와 인상주의자들-을 고려해 봄으로써 혹은 심지어 그의 작품에 대한 그 자신의 판단에 의지해 본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더 명백하게 돨 것 같니도 않다.

1870년경에 이르기까지, 그의 초기의 작품들은 약탈이나 살인 등을 그린 환상적인 작품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 작품은 거의 항상 넒은 화필 (broad stroke)로 처리되고 있었으며, 그들의 가시적 측면들보다도 행위에 대한 도덕적인 인상 physiognomy 을 나타내고 있었다. 후에 가서 세잔느가 회화란 상상된 장면의 구현, 다시말해 꿈을 외부로 투사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정확한 연구 즉 화실 속에서의 작업이 아니라 자연을 바라다보며 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 것은 특히 피사로의 덕택이었다. 인상주의자들 덕분으로 그는 운동을 포착하는 것이 제일의 못적이었던 바로크식의 기법을 포기하게 되었고, 대신 작은 터치를 빽빽하게 나열하는 기법과 끊기를 요하는 선영기법 hatching 을 사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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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인상주의자들과 이내 결별을 했다. 인상주의란 대상들이 순간적으로 우리의 눈을 때리고, 우리의 눈을 엄습하는 바, 바로 그 방식을 그림 속에 포착해 놓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상들은 일정한 윤곽도 없이 빛과 공기로 둘러싸인 채 순간적인 지각에 나타나는대로 묘사되고 있따. 이러한 빛의 덮개 envelope를 포착하기 위해서라면 사람들은 sienna 와 black 등을 화면에서 배제하여 오직 스펙트럼의 일곱가지 색만을 사용하여야 했다. 대상들의 색은 캔버스 위에 그들의 고유색조 local tone 을 칠해놓음으로써, 곧 대상들이 그들의 환경으로부터 고립되어 띠고 있는 색을 단순히 칠해 놓음으로써 재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자연의 고유색들을 수정해 놓는 대비현상에 대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일종의 역현상으로서, 자연에서 지각되는 모든 색채들은 보색의 현상을 일으켜 놓고 있다. 그리고 이들 보색들은 서로를 강화시켜 놓고 있다. 아파트의 침침한 불빛 속에서 보여질 그림에 햇빛을 받은 색채들을 얻으려면-만약 당신이 풀밭을 그리고 있는 경우라면- 물론 초록색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초록색을 생생하게 해줄 보색으로서의 빨강색도 있어야 하낟. 마침내 인상주의자들은 고유 색조 자체를 파괴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느 색을 구성하고 있는 색채들을 섞는 것이 아니라 나란히 병치시켜 놓음으로써 그것을 획득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더 생생한 색깔 (hue) 를 얻는 것이다. 이런 과정의 결과로 화면-이제는 자연과 1대1의 대응물이 아닌 화면-에는 각 부분들이 상호 미치고 있는 작용과 영향이 그려짐으로써 우리가 사물을 대할 때 받는 인상 그 자체를 재생시켜 놓고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대기를 묘사하고 고유색을 깨뜨려 놓음으로해서 대상 자체가 침몰되게 되어 대상은 그 고유한 중량감을 잃게 된다. 그러나 세잔느가 사용한 팔렛트의 구성을 보면 그에게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스펙트럼의 7가지 색을 사용하는 대신 그는 18가지 색- 6가지의 red, 5가지의 yellow, 3가지의 blue, 검은색-을 사용하고 있다.

따듯한 색채와 검은 색을 사용함으로써 대상을 재현하려 했고, 다시 대기 배후에 있을 그 대상을 발견하려 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tone 을 깨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기법을 누진적인 색채들 graduated colors 과 한 대상 전체를 통한 색채의 뉘앙스의 발전, 대상이 지닌 형태와 대상이 받는 빛에 가깝도록 해주는 색채 변조 modulation 로 바꿔치기 했다. 어떤 경우에는 윤곽을 없애고 윤곽보다 색채에 우선권을 주었는데, 세잔느와 인상파들에게 있어 이들은 각각 다른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대상은 이제 반사광으로 가려지거나, 아니면 대기 및 다른 대상들과의 관계 속으로 소멸해 버리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그 대상은 내부로부터 은밀한 빛을 받는 것처럼 보여, 마치 빛이 거기에서 발산되고 있는 것 같다. 그 결과 그는 입체성과 물질의 실체성에 대한 인상을 획득해 놓고 있다. 더구나 세잔느는 따듯한 색채들에도 생생한 느낌을 주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색채감각 chromatic sensation 을 그는 푸른색을 사용함으로써 획듯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세잔느는 자연을 이상적인 모델로 삼고 있는 인상주의 미학을 포기하지 않은 채 대상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라고. 에밀 베르나르가 고전주의 화가들에게는 윤곽, 구성, 빛의 분배가 반드시 요구되었다는 사실을 세잔느에게 상기시켜 주었을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들은 그림을 만들어 create내려 했지만 우리는 지금 자연의 한 부분을 시도하고 있는 중일세.” 그리고 과거의 거장들에 대해서 그들은  “리얼리티를 그것과 상상을 수반하는 추상으로 대체시켜 놓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화가는 이 완벽한 예술작품에 순응해야 한다. 모든 것은 자연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며, 우리는 자연을 통해서 존재하고 있다. 이것만이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인상주의를 토대로 마치 박물관에 있는 예술처럼 견고한 무엇인가를 만들고자 했다고 그는 진술하고  있다. 그런만큼 그의 그림은 역설적인 데가 있었다. 왜냐하면 감각적인 표면 sensuous surface 을 포기하지 않은 채 오직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인상만을 가지고, 그리고 뚜렷한 형태 윤곽을 따르지도 않아 색채를 둘러싸는 윤곽선도 없고 나아가 원근법적이나 혹은 회화적인 배열도 없는 채, 그러면서도 리얼리티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베르나르는 세잔느의 자살 행위라 불렀다. 리얼리티에 이르는 방법을 포기한 채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것, 이것이 세잔느가 곤란을 겪었던 이유이며 또한 1870년과 1890년 사이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형태 왜곡distortion의 이유였던 것이다. 측면에서 보여진 컵과 쟁반은 타원형이 되어야 하겠지만 세잔느는 타원의 양쪽 끝을 부풀고 팽창되게 그려놓고 있다. Gustav Geffroy를 그린 초상화에서도 작업대가 원근법과는 반대로 그림의 아랫부분까지 펼쳐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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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곽선을 포기하면서 세잔느는 감각의 혼돈 상태로 자신을 내맡겼다. 이러한 감각의 혼돈은 대상을 뒤집어 놓고 있으며, 만약 우리의 판단이 언제나 그들 외관을 똑바로 조정해 놓지 않고 있다고 한다면 끊임없이 환상-예를 들어 우리가 머리를 움직일 때 물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여겨지는 환상-을 보여 줄 수 있었을 것이다. 베르나르에 의하면 세잔느는 “무지 속으로 자신의 그림을, 어둠 속으로 자신의 정신을 침몰시켜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한 내용의 반만큼에도 우리의 마음을 열어 놓지 않고, 그가 그린 것 앞에 눈을 감아버리기 전에야 우리는 이런 식으로 그를 판단해서는 절대 안된다.

세잔느와 베르나르 사이에 오고 간 대화를 통해서 볼 때 그는 이미 고정되어 버린 양자택일-감각과 판단, 보는 화가와 사고하는 화가, 자연과 구성, 원시주의 Primitivism와 전통간의 양자택일-을 피하려고 노력했음을 분명히 알아챌 수다 있는 일이다.

((세잔느와 베르나르의 대화))

세잔느: 우리는 하나의 새로운 광학 optics를 개발시켜야 한다. 즉 논리적인 비젼을 두고 말함이다. 불합리한 요소가 조금도 없는 그러한 비젼을-.

베르나르: 자연을 두고 말함인가?

세잔느: 양쪽 모두에 관계가 있는 것이라야만 하네

베르나르: 그러나 자연과 예술은 서로 다르지가 않은가?

세잔느: 나는 그 둘을 같은 것이 되게 하고자 하네. 예술이란 개인의 통각 apperception으로서, 나는 이것을 감각으로 구현시켜 그것을 지성의 힘을 빌어 작품 속으로 구성시켜 놓으려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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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표현들 역시 “감성sensitivity” -혹은 “감각”-과 지성에 대한 일상적인 개념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 되고 있다. 세잔느가 자신의 주장으로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가 없어 왜 그림을 그리지를 좋아했는가 하는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전통을 창시할 사람들, 말하자면 철학자라든가 화가에 대해서보다는 그러한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들에 훨씬 적합한 것이 되고 있는 양분법을 그의 작품에 적용하지않고, 그는 계속적으로 전통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회화의 진정한 의미를 추구하길 더욱 좋아했다. 그는 감정과 사고, 혼돈과 질서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보는 고정된 사물과 그 사물이 나타나는 가변적인 방식을 분리시켜 놓기를 원치 않았다. 즉 그는 형태를 띤 물질, 자발적인 조직 spontaneous organization 을 통한 질서의 탄생을 묘사하려 하였다. 그는 이른바 “감각기관들”과 “오성”을 구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우리가 지각하는 사물의 자발적인 조직과 관념 및 과학 등의 인간적인 조직을 구별하였다. 우리는 사물을 바라다본다. 우리는 그들의 존재에 관해 일치하고 있다. 즉 우리 인간은 그들 사물에 닻을 내리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과학을 구축하고 있는 것도 기초로서의 이와 같은 “자연”을 가지고서이다. 세잔느는 이러한 원초적 세계 promodial world 를 그리길 원했다. 그러므로 동일한 풍경을 사진으로 찍을 경우 그것이 인간의 작업 곧, 편의와 절박한 현존을 암시시켜 주고 있는 반면, ㄱ의 그림은 자연을 순수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야만인처럼 그리기를” 세잔느가 원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지성, 관념, 과학, 원근법, 그리고 전통 등을 그들이 매달려 있는 자연의 세계에 접목되고 있는 것으로 소급시켜 놓기를 원했으며, 그리하여 과학을 “그것의 근원”인 자연에 대치시켜 놓고자 했다.

원근법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 같은 현상에 충실함으로써 세잔느는 최근의 심리학자들이 공식화하게 된 것을 발견하였다. 즉 우리들이 실제로 지각하는 원근법인 생생한 원근법은 기하학적인것도, 사진기의 원근법도 아니라는 사실이다…..(내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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